2011년 6월 23일 목요일

3. 문종-단종-세조-예종

세종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였고 젊어서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세종의 고질병은 등과 허리에 창이 생기는 풍질이었다. 이것은 통증은 물론 고열과 함께 어깨쑤심을 가져왔다. 세종은 중풍과 노안 등도 앓았는데 이 질병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온천을 종종 갔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자 왕세자 향, 즉 후일의 문종에게 섭정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445년이었다. 그리고나서 세종은 1450년 4월 8일 승하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세종은 태종의 세째아들이었다. 세종은 첫째아들인 왕세자 향, 즉 문종과 둘째아들 수양대군 그리고 셋째 안평대군 여섯째 금성대군 등을 남겼고 세손으로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남겼다. 세종은 문종이 허약함으로 인해서 왕위를 오래 못버틸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므로 단종을 왕세손으로서 일찌감치 책봉하였었다. 단종의 모친이었던 승휘권씨가 단종을 낳은 다음날 타계하자 세종은 자신의 후궁인 혜빈양씨로 하여금 단종의 보모가 되도록 하였었다.

보위에 오른 문종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종의 왕세손을 세자로서 책봉하였다. 왕이 세자를 책봉하는 주된 이유는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 였다. 다음 왕권을 위한 경쟁과 분쟁의 원인을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좋은 방책이었는데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 제정로마제국에서는 공동황제제도가 있었다. 로마제국에서는 황제와 부황제가 있어서 로마제국의 동과 서는 한번에 4명의 황제가 있을 수 있었다.

1451년은 문종 원년이다. 문종이 즉위한 작년 1450년은 즉위년이었다. 문종 2년인 1452년은 세종대왕의 대상제가 있는 해였다. 문종은 왕세자로서 세종 말기에 섭정하는 동안 몸이 많이 나빠졌었다. 문종의 고질병 또한 종기였다. 중국에서는 조선사람들이 차고 날로 된 음식을 좋아하여 창종이 많다고 하였다. 문종의 즉위한 후에는 몸이 더 많이 나빠져서 재위 내내 병상에서 국무를 처리하였다.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후인1452년 5월 14일 6시에 승하하였다. 향년 39세였다. 문종은 세종의 장남으로서 외아들 단종과 경혜공주를 남겼는데 경혜공주의 남편은 영양위 정종이었다. 후일에 댠종은 나이가 비슷해서였던지 매형인 영양위 정종과 잘 어울린다.

세종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단종은 12살의 나이에 보위에 올랐다. 그의 부친인 문종은 이미 승하하였고 그의 모친인 승휘권씨 현덕왕후는 그를 낳고나서 다음날 타계했었다. 그는 자신의 할머니이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단종의 즉위와 함께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이어린 단종은 황표정치를 시행하였다. 의정부가 천거대상자들을 3배수로 천거해서 올리면 단종은 낙점될 자의 이름 위에 노란점을 찍어서 결재하였다. 조정의 김종서와 황보인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왕실의 권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꼈던 왕실은 양녕대군을 비롯하여 저으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조숙하여 15살의 나이에 유곽을 출입하였었다. 그의 호탕함은 할아버지인 태종을 닮았다고도 하였다. 수양대군은 권남과 그의 친구인 한명회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권남은 식년시 장원급제자로서 사헌부 감찰관이었고 한명회는 개국공신이었던 한상질의 손자였다. 한명회는 그의 모친이 임신한 지 일곱달만에 나온 칠삭동이었는데 어려서는 허약하였지만 그때 당시는 경덕궁 문지기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도량과 판단력을 높이 샀다고 했다.

단종의 또다른 숙부는 안평대군이었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세째아들이었으므로 수양대군의 동생이었다. 조정의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는 떠오르는 수양대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안평대군과 손을 잡고 왕실과 조정의 세력균형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제 김종서와 수양대군, 이 둘간의 목숨을 건 세력다툼이 임박해졌다.

단종 1년인 1453년 10월 10일 벌어졌던 계유정난은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싸움이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와 권남과 더불어 모의를 짰다. 한명회의 친구였던 사복시 주부 홍윤성과 홍달손 등은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어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손을 잡고있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였다. 곧바로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됨과 동시에 판이병조사가 되어서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좌의정은 정인지, 우의정은 수양대군의 사돈인 한확, 도승지는 최항, 우승지는 신숙주가 되었다. 논공행상과 공신책록이 이어졌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 난리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던 안평대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한편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탸계하자 그의 손자가 어린나이에 건문제로서 황제가 되었다. 주원장의 넷째아들 연왕 주체는 자신의 조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 남경을 함락햐였다  이것이 1399년에 있었던 정난의 변이다. 이것으로 연왕이었던 주체는 건문제를 폐위하고 명나라 제 3대 황제인 성조가 되었다.

이징옥의 난이 일어났다. 이징옥은 그당시 김종서의 천거로 함경도절제사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반정으로 새 조정이 들어서자 그는 파직이 되어버렸다. 이징옥은 이에 불만을 품고 함길도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는 한편 여진족의 후원으로 대금국을 창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 반란은 단종의 매형인 영양위 정종이 술책을 써서 이징옥이 주살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세종의 충신이자 세조의 충신인 신숙주는 38세의 나이에 승정원 도승지에 승차하였다. 도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면서 왕을 보필한다. 이쯤에 신숙주의 아들과 한명회의 첫째딸이 혼인하였다. 한명회는 승정원 정3품 동부승지에 승차하였다.

단종은 판돈령부사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단종과 중전송씨 모두 16세 동갑이었다. 이때가 단종 3년인 1455년이었는데 이해의 6월 11일에는 수양대군의 위세와 억압에 눌린 단종이 스스로 수양대군에게 대보를 물려주면서 양위하였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고 세조는 보위에 등극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세종의 아들들인 금성대군과 화의군이 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아들이고 화의군은 세종의 서자이다. 이 역모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 금성대군, 영양위 정종 등이 유배되었다.

세조는 세조 1년 1455년 자신의 즉위에 대한 공훈으로서 좌익공신의 1등공신에 한확, 한명회, 신숙주, 권남, 윤사로 등을 봉하였다.그리고 세조는고명과 책명을 위하여 신숙주를 주문사로 그리고 권남을 사은사로 하여 명나라로 보내었다.

세조 2년, 즉 1456년에 창덕궁에서는 명나라에서 온 사절단을 위한 피로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 날 성삼문은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세조를 제거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경비가 삼엄하였다. 한명회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등과 거사를 치루기로 되어 있었던 김질과 정창손은 똥끝타게 두려운 나머지 이 역모 사실을 밀고하고 말았다. 그러자 세조는 대노하였고 그때부터 피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집현전 출신의 좌부승지 성삼문과 그의 7형제 그리고 부친인 성승은 몰살되었다. 그리고 형조참판 박팽년, 장원급제자였던 하위지, 고려충신 이색의 증손자 이개, 그리고 무관이었던 유응부 등은 참수되거나 작형되었다. 작형은 불살라 죽이는 것이다. 그때 유성원은 자살하였다. 이것이 병자년의 옥사이다. 지금 청량리에는 이들을 모신 사육신 묘가 있다. 이 역모를 밀고했던 김질과 정창손은 후일에 영의정으로 승차한다.

세조는 이 역모의 배후에 상왕인 단종과 관련되었다고 보았으므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내버렸다. 그런데 그때까지 경상도에 유배를 가있었던 금성대군이 다시 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이 되었다. 세조는 자기동생인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나서 세조는 유배되어있는 노산군, 즉 단종에게도 금부도사를 보내었다. 이어서 노산군은 세조의 명에 따라서 활줄에 목이 졸린채로 타계하였다. 향년 17세였다. 세종실록은 그가 스스로 자결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단종의 장인이었던 송현수는 관노가 되었고 대비 송씨부인은 갈 곳 없는 여승들이 모여 살았던 승방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후일 82세의 일기로 타계한다. 나중에 노산군과 사육신은 200년도 더 지난 1691년 숙종때가 되어서야 복위된다.

세조는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난리의 불씨었던 집현전을 혁파하였고 경연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의 업무는 예문관과 홍문관에서 나누어서 하게되었다. 세조 5년에는 집현전의 학사 출신이었던 신숙주가 여진족과의 변경인 함길도의 함길도제찰사가 되었다. 그는 문관으로서 뿐만아니라 무관으로서도 명성이 있었다. 한편 세조는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세조는 닉랑부인 정희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얻었던 장남 도원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그때 왕세자 도원군은 수빈한씨와 혼인을 맺고 있었다. 왕세자 도원군 의경세자는 왕세자빈 수빈한씨와의 사이에 월산군과 차남 자산군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왕세자 도원군 의경세자가 20세의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나중에 수빈한씨는 자신과 의경세자 도원군 사이의 차남인 자산군이 성종으로서 보위에 오르게되자 인수대비가 되어서 수렴청정을 하게된다.

세조는 곧 자신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왕세자인 해양대군, 즉 후일의 예종은 한명회의 셋째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왕세자는 11살이었고 세자빈 한씨는 16살이었다. 다음해에 세자빈 한씨는 출산하여 원자인 분을 낳고 5일 만에 타계버린다. 그리고 묘하게도 원자인 분은 3살이 되었을 때 타계한다. 이어서 왕세자인 해양대군은 한백륜의 딸을 계비로서 맞이하였다.

한명회는 딸 넷을 두었는데 첫째는 신숙주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둘째는 윤사로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세째는 해양대군의 세자빈이 되었지만 원자를 낳고 5일만에 타계하였다. 넷째는 멀지않아 자산군, 즉 후일의 성종의 왕비가 될 것이다. 후일에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국구가 될 것이다.

세조는 호폐법을 부활하여 권력을 중앙집권화 하였다. 세조는 1467년 세조 13년에 대원각사를 창건하였고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세웠다. 한편 이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하여 상부 3개층 옥개석이 지상으로 내려졌다. 이것을 5백년 가까이 지난 1946년에 미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이 미공병대에 부탁해서 원래대로 복원하였다. 이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지금 탑골공원 안에 있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서들을 간행하였다. 정몽주의 문하였던 김종직은 세조가 성리학의 이념에 반하여 불교에 쏠리는 것에 반대하여 여러번 사직상소를 올리곤 하였다. 한편 세조는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시행하였다. 과전법과 직전법의 차이에 관하여는 이미 언급하였다. 수조권자인 전주와 경작권자인 전호 그리고 토지의 소유자인 왕과의 관계는 갑오경장을 지나서 대한제국기를 거쳐 을사조약 이후로 일본제국에 의한 토지조사업이 이루어지고 이것을 기초로 등기부등본이 만들어질 때 토지의 소유 또는 점유 그리고 보유에 관련하여 분쟁의 불씨가 된다.

세조는 몸에서 악취가 날 정도로 종기 때문에 고생하였다. 세조는 그것 때문에 온천욕을 자주 다녔다. 1467년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 도원군의 아들인 자산군이 한명회의 넷째딸과 혼인하였다. 자산군은 11살이었고 한명회의 넷째딸은 12살이었다. 그해 5월 16일에는 전 회령절제사 이시애가 함길도 길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중앙의 관리를 지방으로 파견하였는데 지방의 유항소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들이 중앙의 정책에 대립하면서 마찰을 빚게되었다. 세조는 자신의 동생인 임영대군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귀성군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파병하였다. 곧 관군은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여진으로 도피하려는 이시애를 붙잡고 참수하였다. 유자광은 이때 공을 세우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음해인 1468년 귀성군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의 나이30세였다. 그리고 유자광은 서자였음에도 세조의 은총으로 온양별시의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세조는 1467년 9월 7일 승하하였다. 향년 54세였다. 세조는 자신의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아서 그를 주살하였고 자신의 동생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주살하였다. 세조의 장남인 왕세자 도원군, 의경세자가 갑작스럽게 타계하였고 세자빈이자 한명회의 세째딸은 출산 직후에 타계하였고 그녀의 원자는 세살 때 타게하고 말았다. 세조는 둘째아들 왕세자 해양대군, 즉 후일의 예종을 남겼고, 도원군 의경세자와 세자빈 수빈한씨와의 소생인 손자 자산군을 남겼다. 자산군은 후일 성종이 될 것이고 수빈한씨는 인수대비로서 세조의 왕비인 닉랑부인 정희왕후 윤씨와 함께 수렴청정하게 될 것이다.

세조의 왕세자 해양대군이 보위에 올라서 예종이 되었다. 예종은 그때 19살이었는데 그의 모친인 낙랑부인 윤씨 즉 정희왕후가 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였다.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고 있었는데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위한 징조다' 라고 읖조렸다. 우연히 이 말을 듣고 있었던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예종에게 일러바쳤다. 예종은 세자 때부터 남이와의 사이가 안좋았었는데 이것을 기화로 남이를 제거하고 말았다. 이 '남이의 옥'으로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는 익대공신의 1등공신이 되었다.

에종은 삼포 즉 부산포, 염포, 제포에서의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였다. 예종은 역둔토의 일부를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둔토란 병영에 딸려있는 논과 밭을 말한다. 예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재위 2년만인 1469년 그의 나이 20세였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왕세자로서 책봉이 아니된 상태였다. 수렴청정을 하고있던 왕대비 정희왕후 윤씨는 당일날 즉각 한명회와 결탁하여 수빈한씨와 도원군 의경세자 소생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을 왕위에 올렸다. 이로써 정희왕후 윤씨는 대왕대비가 되고 예종비인 안순왕후 한씨는 왕대비가 되고 수빈한씨는 인수대비로서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할 것이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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