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1일 화요일

2. 세종

세종은 집현전을 강화하였다. 집현전은 고서를 수집하고 경서를 편찬, 간행하고 왕에게 경연하는 기구로서 대제학, 제학, 직제학 등의 직급이 있었다. 그리고 세종은 주자소를 확장하고 자치통감강목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자치통감강목은 송나라때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다가 강과 목을 붙여서 새롭게 분류해서 내용을 재정리한 역사서이다. 자치통감은 주나라에서부터 송나라까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294권으로 되어있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 내용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제환공이 관중을 얻어서 패업을 이루었고 진목공이 백리해를 구하고 빛났다. 한편 통감이란 거울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귀족의 자녀들은 천자문에서 시작하여 명심보감과 소학을 학습하고나서 자치통감 순으로 학습하였다.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박을 맞고나서 신열을 크게 앓았다. 그리고 곧 승하하였다. 1422년 5월 10일 이었고 향년 56세였다.

세종이 총애하였던 장영실은 동래 관노였다. 그의 부친은 원나라 항저우 사람이었고 모친은 동래 기생이었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 유학을 갔다온 후에 흠경각과 물시계등을 만들었다. 장영실은 노비의 신분에서 일약 정3품 상호군까지 도약하였지만 그의 말로는 불행하였다. 그는 세종이 타고 다니는 어가의 제작을 감독하였는데 세종이 강원도 이천에 있는 온천으로 휴양를 가는 중에 어가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불경죄로 기소되었고 곤장 수십대를 맞고 파면되고 말았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더불어 천문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흠경각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모형으로 제작한 것인데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도록 햐였고 천체의 운행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였다. 또 아랍인과 함께 달력의 제작에도 참가하였다. 수시력은 원나라때 곽수경이 제작한 것인데 장영실은 수시력을 바탕으로 우리실정에 맞도록 달력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칠정산 내편이다. 칠정이란 해와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말한다. 한편 수시력은 일년의 길이를 365.24일, 그리고 한달의 길이를 29.53일로 나타내었는데 우리가 현재 쓰고있는 기준값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리고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도입하여 만든 것인데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으로 나타내었다. 이것은 그리스 수학에서 따온 것이다.

장영실이 노비의 신분이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매매, 상속, 기증, 공출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거주이전의 자유는 없었으나 면천은 가능하였다. 신역의 고통 때문에 도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은 고려시대의 노비제도를 답습하였다. 고조선때 8조금법에는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한편 천자수모법은 천민의 신분을 모계에 좇아서 결정짓는 법이다. 고려광종때 노비안검범은 원래 양인이었던 자들과 전쟁포로, 빚등 금전관계로 인하여 노비된 자를 면천하여 양인화 하였지만 고려셩종때는 노비환천법을 시행하여 그들을 다시 천민화 한 적이 있었다.

 세종의 충신인 맹사성은 음을 바로잡고 정악을 정돈하면 백성의 마음이 순화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음악의 도가 넘치면 환락적이 되고 음탕하여진다고 하였다. 맹사성은 박연으로 하여금 악기를 정비하여 아악을 정립하도록 하였다. 악학별좌 박연은 편경의 제작에 필요한 희귀한 경석을 우리 땅에서 발견하였고 편경을 국산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편경은 중국의 것보다도 훨씬 더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고품질이었다고 한다. 이 편경은 그때부터 모든 악기의 조율을 위한 절대표준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황종12율이 정립되었는데 그것은 황종관의 음높이의 비율에 따라서 조율한 것이었다. 이 황종12율은 피타고라스 음율과 동일하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사대부 중에 권채라는 자가 있었다. 덕금이는 사대부 권채의 하녀였다. 권채의 부인인 정씨가 덕금이와 권채의 로맨스 또는 불륜을 알게 되자 분노가 불같이 일었다. 정씨부인은 덕금이를 광에 가두고 며칠을 굶긴후에 밥 대신 똥오줌을 먹게 하였다. 불쌍한 덕금이는  며칠동안 그렇게 식사를 해결하여야 했다. 한편 정씨부인은 덕금이의 똥에서 구더기가 생기자 덕금이에게 구더기 생긴 똥을 먹게 해 보았지만 먹이기가 여간 쉽지가 않았다.그런데 그녀는 기어이 덕금이의 항문을 바늘로 찔러가면서까지 끝내 성공해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의금부가 이 일을 알게 되자 권채는 칙첩이 회수되었고 정씨부인은 곤장 90대를 맞고야 말았다. 한편 공자가어는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가지의 이유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첫째 투기, 둘째 음란, 셋째 도둑질, 넷째 수다, 다섯째 교만, 여섯째 무자식, 일곱째 나쁜 병이다. 그러나 예외로서 삼불출의 규정도 있었다. 첫째는 내쫓아도 갈 곳이 없을때 둘째는 부모의 3년상을 함께 치른 경우 셋째는 혼인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 후에 부자가 된 경우가 있었다.

조선은 유교문화 사회였다. 유교는 공자의 발명품으로서 한마디로 수신하고 제가하고 치국하여 평천하하는 것이다. 다분히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있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최고선은 '인'이었다. 이 인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은 '덕'이었으므로 진정한 군자들은 덕을 쌓는 데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했다. 그래서 조선의 소년소녀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이 몸에 베어 있었다. 그것은 유교사회의 질서 안에서 덕을 행히는수행이었고 인을 완성하기 위한 수양이었다. 한편 공자와 동시대의 서양인으로서는 그리스의 탈레스가 있었다. 그는 만물이 근원이 되는 물질을 '물'이라고 보았다. 즉 모든 사물의 본질은 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는데 춘추전국시대의 막바지였던 노나라 사람이었고 춘추를 남겼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서이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기록한 '역사'를 남겼는데 그는 기원전 480년 사람이었다. 한편 공자의 윤리학은 나중에 송나라때에 와서 도교의 형이상학과 합쳐지면서 성리학이 되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뇌물사건때문에 충청도 회인으로 부처되었다. 그는 뇌물 780관을 수수하였지만 세종은 그를 복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조말생은 복직이 되자 세종에게 조세법의 개혁을 주청하였다. 과전법의 바탕위에서 시행되던 수손급손법은 그 해의 작황이 흉작일 경우에 수확의 손실량에 따라서 조세를 감면해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것을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위임함으로써 뇌물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조말생은 이것을 공법으로 바꾸어서 토지의 등급에 따라서 세곡을 거두도록 건의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관리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여론을 수집해오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나중에 새 공법이 등장하게 된다.

한편 과전법은 조선의 토지조세제도였는데 왕은 왕실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생계수단으로서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과전이란 토지의 양을 말하는 것인데 1과에서부터 18과로 나누어서 그 양을 차별화 한 것이다. 그리하여 1과는 그 양 또는 크기가 180결이었고 18과는 10결이었다. 한편 과전을 받은 관료는 수조권을 가졌고 노동력을 고용하여 그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는데 경작자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수조권자인 관료에게 바쳤다. 수확량의 10분의 1이란 토지 1결당 현미 30두를 말하는 것인데 이 조를 받은 수조권자 관료는 왕에게 백미 2두를 세금으로서 바쳤다. 또 이 관료가 죽으면 부인과 자식은 댱대에 한하여 이 토지의 수조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을 수신전과 휼량전이라고 하였다. 이 과전법은 세조때에 가서 직전법으로 바뀐다. 직전법은 다름아니라 수신전과 휼랴전이 제거된 것이므로 관료가 죽으면 그의 과전인 토지는 왕에게 복귀한다.

세종의 맏아들 왕세자 향 즉 후일의 문종은 세자빈으로서 김오문의 딸을 맞이하였다. 이 휘빈김씨는 질투심이 대단하였다. 왕세자 향이 여러 후궁들과 어울리면서 자기와의 사이가 소원해가자 그 후궁들을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세지빈 휘빈김씨는 압승술을 써서라도 왕세자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하녀인 호초로 하여금 왕세자가 사랑하는 후궁의 신을 빼앗아 오게 하였고 그것을 잘라 불태웠다. 그녀의 압승술은 그 태운 후에 남은  재를 왕세자가 음복하여야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탄로가 났고 휘빈김씨는 폐비되고 말았다. 그리고 호초의 부친이었던 원주목사 아무개는 삭탈관직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세자빈으로서 봉씨부인이 책봉되었는데 이 순빈봉씨는 색녀였고 동성애의 기질도 갖추고 있었다. 이 순빈봉씨는 궁녀인 소쌍과 신나게 동성애를 하다가 발각이 되고말았다. 그리하여 순빈봉씨 또한 폐비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한나라때 광무제와 당나라때 현종이 각각 아내를 내친적이 있었다. 여복이 박복했던 후일의 문종이 될 왕세자 향은 후궁이었던 권씨부인과의 사이에 경혜공주와 후일의 단종을 두게 된다.

세종은 집현전의 부제학인 설순으로 하여금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삼강이란 군신,부자, 부부인데 아녀자들에게 도덕적인 행실이 될만한 충신과 효자, 열녀들을 뽑아서 이야기를 덧붙여서 만든 그림책이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식년시라고 해서 자, 묘, 오, 유의 해에 3년마다 시행하는 정기시가 있었고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의 비정기시가 있었다. 종류에 따라서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문과는 순서에 따라서 초시, 복시, 전시가 있었다. 초시는 각 도에서 인구비례로 뽑았고 복시에서는 그들 중에서 33인을 추려내었고 마지막 전시는 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고 순위를 정하였다. 태조 2년에 처음 식년시가 시행되었고 태종 8년에는 무과인 용호방이 시행되었다.

세종은 여진족들이 압록강을 넘어서 침범해오자 최윤덕을 보내서 그들을 내쫓고 거기다가 4개의  고을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4군이다. 또 그 다음해엔 함경도 절제사인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의 동북면에 온성, 회령, 경흥 등 6개의 신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6진이다. 세종은 이 신도시들에 대거 이주민을 들여보냈다. 이주자들에게는 여러 특혜가 주어졌는데 옥중에 있는자가 이주를 희망할 경우에는 사면이 되었고 노비였던 자는 평민으로 신분상승이 되었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세금이 면제되었다. 당나라때 태종 또한 남쪽지방의 죄수들을 요동지방에 이주시켰던 적이 있다. 한편 여진족은 퉁구스계로서 말갈족의 후예이다. 요나라의 거란족들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발해의 주민이었던 흑수말갈족들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길림성의 숙여진은 온화하였으나 조선의 국경 가까이 있었던 생여진은 호전적이었다. 그리고 완안부의 우야소 동생인 아골타는 111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아골타는 스스로 칸이 되었고  남송과 국경을 마주할 정도로 강성해젔다. 그러나 1189년에는 남쪽의 남송과 북쪽의 몽고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었는데 1234년에 강력한 몽고의 징기스칸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후일에 건주여진족의 누르하치는 만주족으로 개명하였고 그의 아들 홍타이치는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7년 가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세종은 기우제를 지냈다. 사직단과 소격전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사직단은 땅신을 위한 제사장소였고 소격전은 하늘신을 위한 제사장소였다. 엄밀히 따지면 소격전에서의 제사는 이민족의 풍습이었고 도교의 관습이었다. 이 소격서의 소격전에서의 제사는 중종때 조광조가 시비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된다.

세종의 총신 신숙주는 외국어 능통자였다. 그는 중국어, 이두, 왜어, 몽고어, 여진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을 완성하는 데에 공헌을 하였다. 훈민정음의 자음은 발성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인데 목구멍소리(후음, ㅇ), 어금니소리(아음, ㄱ), 혓소리(설음,  ), 잇소리(치음, ㅅ), 입술소리(순음, ㅁ)로 구성되어 있다. 모음은 천, 지, 인을 본뜬 것인데 천은 ㅏ, ㅗ 지는 ㅓ, ㅜ, ㅡ 인은 ㅣ로 되어 있다. 이 훈민정음은 1443년 12월 30일 반포되었다. 이어서 동국정운을 간행되었다. 동국정운은 중국의 홍무정운을 우리말로 정리한 것이다.  한편 홍무정운은 13000여 한자를 평성, 상성, 거성, 입성 등 4성으로 운을 달아서 정리한 운서이다.

정인지는 치평요람을 편찬하였는데 주나라에서 원나라까지 그리고 기자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와 풍속을 150권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 정인지가 서문을 써서 용비어천가를 편찬하였는데 조선건국의 정당성과 선왕들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세종의 왕비인 공비심씨 소헌왕후가 52세로 타계하였다. 세종 28년 이었다. 세종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짓게 하여 한문과 언문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인데 월인천강지곡은 이것을 노래가사로 엮은 것이다. 한편 석가모니는 지금의 네팔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타르타를 말한다. 그는 공자와 동시대인으로서 55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어느 왕국의 왕자였는데 우연히 궁궐 밖을 나가게 되었고 농부들이 노역하는 모습을 보고서 존재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감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초라하게 늙은 노인을 보게되자 인생이 무상함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번뇌를 극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을까 하여 출가하였다. 그리고 고타마는 마침내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달았고 번뇌에서 해방되었다. 한편 그가 깨달은 도는 '자타불이'였다. 자타불이란 너와 나, 자아와 타자, 즉자와 대자의 구별을 무차별화하는 것이다. 이 자타불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연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이 자타불이를 현실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자비라고 한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댓글 없음:

댓글 쓰기